[전문인칼럼] 학습관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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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2-04-06 09:04
- 조회 : 4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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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학습방법은 조선시대의 학습방법보다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루었을까? 사극을 보면 훈장이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모습과 양반가 자제가 방에서 글을 읽는 모습,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호된 호통을 치는 모습 등이 나온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에도 서당에서 배운 부분을 집에서 복습한다는 것과 부모들의 학습에 대한 관심, 글 읽는 소리를 통해 감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백 년이 흘렀지만 현재의 교육 방법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시대에도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부분을 수업 후에 스스로 공부하고 글을 소리 내 읽지 않으므로 학부모의 감시는 학생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돼 시험성적의 결과로 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여기에 학원의 성실한 출석과 보고를 통해 아이의 학습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학부모의 최대치 관심이다. 필자가 경험했던 학부모 중 거실의 소파를 없애고 여러 명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긴 책상으로 바꾼 뒤 학부모는 책을 읽고 자녀들은 책을 읽는 학부모 앞에서 공부를 하는 가정을 볼 수 있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일까, 아니면 학습환경을 만들어주려는 부모의 노력일까.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길러진 학생들에게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왜 청소년의 권리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면서 공부의 경우만 스스로 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학교에서의 교육은 왜 필요하며 선생님과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성년인 학생이기에 판단이 잘못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부족하며 눈앞의 편의성과 순간의 재미에 빠져드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로부터 학습해 온 어른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주는 숙제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반복해 학습하고 숙제를 통해서라도 공부하기를 바라는 의도겠지만 학생들은 빨리 해결하고 놀아야 하는 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숙제를 내는 선생님보다 숙제를 하는 학생들의 잔머리가 더 기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참고로 글을 베끼는 행위는 노동이지 공부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모든 과목의 공부법이 영어단어 암기와 같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독서실이나 공부방에 앉아 있다고 해서 실제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때우는 일이 많다는 것은 어른들도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경우도 자율적인 학습이 아닌 강제자습인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책만 펴 놓은 채 소설 등 다른 책들을 읽는다든지 휴대폰 게임이나 유튜브 시청 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감시자의 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독서실에서의 공부보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들의 경우 카페 내 다른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는 감시자의 시선으로 느끼는 부분이 많다. 실제 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주변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고 열심히 했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불특정 다수지만 학생들이 사회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파악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이미 충분하고 그것을 위한 동기부여도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와닿는 것이라 생각한다. 판단이 미숙한 학생들에게 따뜻한 감시로 관심을 가져주는 게 바람직하다.
좋은 수업을 제공하는 것도 어른의 역할이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학습관리를 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감시라는 단어를 지속적인 관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학습관리를 해나간다면 앞으로의 교육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황성필 대전학원강사연합회 회장
수백 년이 흘렀지만 현재의 교육 방법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시대에도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부분을 수업 후에 스스로 공부하고 글을 소리 내 읽지 않으므로 학부모의 감시는 학생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돼 시험성적의 결과로 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여기에 학원의 성실한 출석과 보고를 통해 아이의 학습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학부모의 최대치 관심이다. 필자가 경험했던 학부모 중 거실의 소파를 없애고 여러 명이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긴 책상으로 바꾼 뒤 학부모는 책을 읽고 자녀들은 책을 읽는 학부모 앞에서 공부를 하는 가정을 볼 수 있었다. 자식을 믿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일까, 아니면 학습환경을 만들어주려는 부모의 노력일까.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길러진 학생들에게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왜 청소년의 권리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면서 공부의 경우만 스스로 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학교에서의 교육은 왜 필요하며 선생님과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성년인 학생이기에 판단이 잘못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부족하며 눈앞의 편의성과 순간의 재미에 빠져드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과거의 나로부터 학습해 온 어른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주는 숙제도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반복해 학습하고 숙제를 통해서라도 공부하기를 바라는 의도겠지만 학생들은 빨리 해결하고 놀아야 하는 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숙제를 내는 선생님보다 숙제를 하는 학생들의 잔머리가 더 기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참고로 글을 베끼는 행위는 노동이지 공부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모든 과목의 공부법이 영어단어 암기와 같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독서실이나 공부방에 앉아 있다고 해서 실제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때우는 일이 많다는 것은 어른들도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안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경우도 자율적인 학습이 아닌 강제자습인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책만 펴 놓은 채 소설 등 다른 책들을 읽는다든지 휴대폰 게임이나 유튜브 시청 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감시자의 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독서실에서의 공부보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들의 경우 카페 내 다른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는 감시자의 시선으로 느끼는 부분이 많다. 실제 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주변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고 열심히 했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불특정 다수지만 학생들이 사회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파악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이미 충분하고 그것을 위한 동기부여도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와닿는 것이라 생각한다. 판단이 미숙한 학생들에게 따뜻한 감시로 관심을 가져주는 게 바람직하다.
좋은 수업을 제공하는 것도 어른의 역할이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학습관리를 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감시라는 단어를 지속적인 관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학습관리를 해나간다면 앞으로의 교육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황성필 대전학원강사연합회 회장